타인 명의로 예금을 한 사람은 법률상 예금주가 아니므로 명의자의 인출이 예상되더라도 지급정지신청을 할 수 없고, 지급정지신청을 거절한 은행에도 인출사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최근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금을 한 이모(48)씨가 농협 지점장 유모(51)씨와 농협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2013다2504)에서 원고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어디까지나 예금계약의 당사자는 명의자인 오모씨이고, 이씨는 오씨와 체결한 금전소비대차계약 등에 따라 자금을 내는 한편, 오씨의 자금 유용을 막고 이를 안전하게 회수하기 위해 통장 등을 지배·관리하면서 입·출금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어 "이씨는 예금주인 오씨의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이 내놓은 자금을 안전하게 회수하기 위해 지급정지조치를 요청했고, 은행거래기본약관상 지급정지조치는 예금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농협 지점장 유씨는 자금 출연자에 불과한 이씨의 지급정지 요구에 따라야 할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지급정지조치는 자칫 정당한 예금주의 권리행사에 예측하지 못한 손해를 안겨줄 위험성이 있으므로 금융기관이 지급정지를 하기 전에 어느 정도 사실관계를 조사,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므로 유씨가 이씨의 요구에 따른 지급정지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씨에게 2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2011년 3월 이씨는 "4억원짜리 예금잔액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오씨의 부탁에 따라 유씨가 지점장으로 있는 농협중앙회 한 지점에서 오씨 명의의 예금계좌를 개설하고 4억원을 입금했다. 이씨는 오씨 명의로 예금잔액증명서가 발급된 다음날 유씨에게 4억원을 인출할 뜻을 밝혔고, 유씨는 이씨를 대신해 예금계좌에서 4억원을 인출해 이씨의 계좌로 입금해주겠다고 하면서 이씨로부터 오씨 명의의 예금통장과 오씨 명의의 출금전표, 이씨 명의의 입금전표를 건네받았다. 유씨는 이씨와의 약속대로 4억원을 출금하려고 했지만, 비밀번호가 맞지 않아 출금에 실패하자 이씨에게 전화로 사실을 알렸다. 이씨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며 지급정지를 요청했으나, 유씨는 예금계좌가 이씨의 것이 아니어서 지급정지조치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비밀번호를 임의로 바꾼 오씨가 2억원을 출금한 사실을 알게 된 이씨는 "유씨가 지급정지신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냈다.
1심은 원고패소 판결했으나, 2심은 "유씨는 이씨가 예금 인출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지급정지요청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40%의 과실을 인정, 8000만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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